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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사건 당시 어느 해군 하사의 글.TEXT 버전

by 죠슈앙 2023.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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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인디아나폴리스함과 ROKS 천안함

(출처:해군게시판 자유게시판/교육사 해군대학 행정부 군수처 하사 조정흠)

 


 

태평양전쟁 종전을 불과 15일 앞둔 1945년 7월 30일.. 미해군의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인디아나 폴리스함은 미공군 B-29폭격기의 발진기지인 티니언섬에 기밀장비를 수송하곤 복귀해역인 레이테만으로 항해 중에 있었습니다. 심한 해무로 인하여 시계가 무척 안 좋았지만 15노트로 순항하며 항진을 계속하던 중 갑작스레 엄청난 충격이 본함을 덮쳤습니다. 근처 해역에 매복중이던 일제해군 잠수함 I-58이 인디아나 폴리스함을 발견하곤 6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그중 2발이 함수와 함교하단 선체에 명중한 것입니다. 선체는 급격히 기울어 명중 12분 만에 본함은 완전히 침몰해버렸으나, 어뢰명중이라는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평소 침착한 성격이었던 함장(찰스 버틀러 맥베이 3세 대령)의 신속한 조난신호 보고명령 및 퇴함명령으로 1,199명의 승조원 중 즉사한 300여명의 승조원을 제외한 9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사고함정에서 이함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퇴함 전 분명히 조난신호를 보냈으나 구조선박이나 항공기는 보이지 않았고, 탈진한 승조원들은 하나둘 죽어갔습니다. 그때 동 해역에 피냄새를 맡은 식인상어 떼가 출몰하였고 이놈들은 처음에는 시체들을 하나둘 뜯어먹더니 먹잇감을 모두 먹어치우고 나선 급기야 생존해있던 승조원들을 습격하였습니다. 승조원들은 상어 떼와 처절한 사투를 벌였고, 8월 2일 근처해역을 지나던 항공기에 발견되어 구조될 때 까지 600여명이 추가로 희생되어 결국 살아남은 승조원은 316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사건 직후 인디아나 폴리스의 함장인 맥베이 대령 및 주요 부서장들은 본국에서 군사법정에 세워집니다. 기소 이유는 함장의 경우 지휘관으로서 경계태세를 소홀히 하였기에 모든 책임은 그에게 있다는 논리였는데, 잠수함에 대한 대비와 대잠 기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 그리고 구조신호를 발송하지 않아서 희생을 키웠다는 것이 구체적인 죄목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재판결과 유죄가 인정되어 불명예 제대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평생을 비난에 따른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결국 1968년 11월 6일 향년 70세의 나이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근데 이 사건을 자세히 뜯어보면 웃기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인디아나 폴리스함은 배수량이 2만 톤에 육박하는 중순양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축함이나 프리깃 등의 호위함정이 단 한척도 제공되지 않았었습니다. 이는 당시 인디아나 폴리스함의 특수임무에 기인했는데, 이 함정은 며칠 후에 나가사키 및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이었습니다. 출항 전부터 맥베이 함장은 호위함의 제공을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작전의 보안성을 이유로 이 의견은 결국 묵살되고 인디아나 폴리스함은 홀로 샌프란시스코를 출항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모든 비극은 예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 인디아나 폴리스함은 중포를 갖춘 중순양함으로서 당연하게도 대잠탐색을 위한 음탐기를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함정이 대잠호위세력도 없이 홀로 작전을 수행하다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죄목으로 대잠 회피기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는데, 이는 뒤에 언급하겠지만, 당시 적장이었던 I-58의 함장 모시토라 하시모토 중좌의 훗날 증언결과 결코 타당성이 없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당시 일본해군 잠수함 I-58은 표적이 소나도 갖추지 않은 중순양함일뿐더러 호위함도 없었기에 인디아나 폴리스의 매우 근거리에서 어뢰를 발사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회피기동은 전혀 효과가 없었을 것이라는 증언이 그것입니다. 또한 당시 I-58이 6발의 어뢰를 발사했음에도 2발 만이 명중한 것은 함장이 신속하게 어뢰의 접근방위로 선수를 돌리도록 지시한 결과이며, 이 때문에 초기 승조원의 대량 즉사를 막을 수 있었다는 점도 후대에 밝혀집니다.

 

또한 구조신호를 발송하지 않았다는 죄목도 있었는데, 당시 인디아나 폴리스함은 분명히 침몰직전 SOS를 타전했었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보고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는데 그 역시 뒤에 언급하겠지만 훗날 맥베이 대령과 인디아나 폴리스 승조원들의 무죄를 입증하는 키가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위의 사실을 알 길이 없는 미국의 민간여론이 맥베이 함장의 경질과 처벌을 줄기차게 요구했고, 결국 모든 명예를 박탈당한 그는 평생을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맥베이 대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인디아나 폴리스 사건도 반세기가 지나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1998년, 미국의 헌터 스콧이라는 12살 난 소년은 “미국역사 기념물”이라는 주제로 방학숙제를 하고 있었는데 소년은 그 주제로 인디아나 폴리스함을 선정하였습니다. 이유는 이 소년이 영화 “죠스”를 무척 좋아했었는데, 이 죠스가 인디아나 폴리스함의 승조원들이 상어 떼의 습격을 당한 비극을 모티브로 상어에 대한 공포를 그린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에 방학숙제 주제를 선정한 소년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자료 수집을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도서관을 돌아다녔으나 이미 잊혀진 사건이고 또한 맥베이 대령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진실은 사라져 버린 채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 되었기에 관련 자료는 매우 미약하였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끈기가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당시 생존해있던 인디아나 폴리스의 생존 승조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이 결과 지휘관 이었던 맥베이 대령과 승조원들이 억울한 처분을 받았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료 수집을 통해 과제를 마친 소년은 이 주제로 웅변대회에 나가서 입상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최종 결선에서는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자신이 인터뷰 했던 생존 승조원들과 함께 맥베이 대령의 무죄를 탄원하는 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12살 난 소년의 행동과 주장은 미디어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고 반세기나 지나서 잊혀졌던 인디아나 폴리스함은 다시금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미 유명인이 된 스콧은 당시 미국 상원의회 군사위원장이었던 존 워너와 만남을 갖게 되었고, 이 문제는 미국의회의 공식결의안건으로 채택됩니다. 맥베이 대령이 유죄냐 무죄냐를 놓고 의회가 한참 공방을 벌이고 있던 1999년 11월 24일.. 존 위너 위원 앞으로 뜻밖의 편지가 한통 도착했습니다.

 

미합중국 상원 군사위원장 존 워너 위원 귀하

 

“저는 당시 인디아나 폴리스함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던 일본제국 해군 잠수함 I-58의 함장이었던 전 제국해군 중좌 모시토라 하시모토입니다. 저는 귀하의 결의안이 1945년 7월 30일 격침된 미해군 중순양함 인디아나 폴리스의 함장 故 찰스 버틀러 맥베이 3세 대령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어뢰공격을 지시했던 장본인으로서 저는 맥베이 대령이 왜 군사법정에 세워졌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경계태세를 소홀히 했다는 유죄 이유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전 인디아나 폴리스가 어떤 상태라도 격침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중략... 저와 인디아나 폴리스의 승무원들은 끔찍했던 전쟁과 그 결과에 대해 서로를 용서했으며, 이제 귀하와 귀하의 나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맥베이 대령에게 씌우진 부당한 혐의를 벗겨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전 I-58 함장, 제국해군 중좌 모시토라 하시모토

 

이 편지는 함장의 경계태만이라는 죄목에 대한 논란을 잠재우기에 충분했으며, 또한 결의안에 따른 기밀 해제된 구 기밀문서에 대한 재수사의 결과 구조신호 미발송건 또한 침몰당시 제때 발송되었으나, 중간 보고라인의 근무태만으로 보고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최소 4개소의 전파수신소에서 인디아나폴리스의 구조신호를 받았으나 한곳은 당직사관이 만취상태였고, 다른 곳의 책임자는 카드놀이에 빠져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호출하지 말 것을 수병에게 지시했었으며, 또 다른 곳은 “전쟁이 거의 끝나서 일본 연합함대는 궤멸되었을 것인데 인디아나 폴리스같은 거함이 어째 침몰할 수 있느냐! 이것은 필시 일본의 기만전문이다!”라며 무시한 것입니다.

 

결국 무죄가 입증된 맥베이 대령은 고인이 되고나서 30여년이 지난 2000년에야 당시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명예회복이 성사되었습니다.

 

맥베이 대령이하 전 승조원에 대해 무공훈장이 수여되었으며, 이때 훈장을 수여받은 생존 장병들은 한평생의 서러움에 북받쳐서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으며, 맥베이 대령의 무덤에 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저희들은 다시 참전한다 해도 함장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이것은 미해군에게 있었던 일련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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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9월 3일자 세계일보 기사입니다.

 

제목 : ‘천안함 문책’ 법정 가나

 

국방부 검찰단이 최근 천안함 사건 당시 천안함 함장 최원일 중령과 서해 2함대 사령관이었던 김동식 소장 등 4명을 입건한 것과 관련, 형사처벌을 염두에 둔 것이란 분석과 함께 ‘무리한 수사’라는 지적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과거 전방 철책선 경계근무자의 근무태만 사례를 제외하면 평시에 작전지휘가 적절했는지를 따져 사법 잣대를 들이댄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최 중령과 김 전 사령관은 이미 변호사를 선임, 기소될 경우 대응에 나설 것으로 알려져 자칫 천안함 사건이 법적 분쟁으로 비화할 조짐마저 보인다. 군 내부에선 천안함 사건을 둘러싼 여론의 곱지 않은 시각으로 군이 한바탕 홍역을 치른 마당에 천안함 사건 지휘라인에 있던 당사자들을 사법처리할 경우 또다시 군심이 흔들릴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최 중령의 경우 적의 기습공격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입장과 지휘관의 작전지휘가 적절했는지에 대한 사법처리는 적절치 않다는 주장이 맞서는 형국이다. 해군 관계자는 2일 “군검찰이 최 중령에 대해 전투대비태세에 소홀했다는 혐의를 적용한 것으로 안다” 면서 “최초에 어뢰에 맞았다는 판단을 지휘부에 보고하지 않은 것도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고 말했다. 그는 “천안함 서건 당시 침몰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고, 군 지휘부도 추정만 했을 뿐인데 함장이 어떻게 침몰 원인을 특정해서 보고할 수 있었겠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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